[대선토론회 : 여성혐오 넘어, 일과 삶을 리셋하라②] ‘촛불대선’,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필요성을 말한다 – 정권교체가 전부? 여성의 요구를 보편의 정치로!

※ 지난 2월 23일 국회에서는 대선 토론회 ‘여성혐오 넘어, 일과 삶을 리셋하라’가 열렸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전국여성노동조합, 6개 국회의원실(국회 여성가족위원장 남인순, 국회의원 권미혁·송옥주<더불어민주당>, 김삼화·신용현<국민의당>, 이정미<정의당>)이 공동으로 주최하였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본 토론회의 내용을 총5회에 걸쳐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첫 번째 발제 “혁명과 협상의 언어 사이, 어떻게 국가에 개입할 것인가? 정치의 시대, 페미니스트 정치학의 필요성”의 내용을 다룹니다 … 기자 말

박근혜는 파면되었고 촛불은 승리했다. 그러나 사회를 재건하는, 어쩌면 재건설하는 작업은 이제야 비로소 첫 발을 떼었다. ‘촛불대선’을 목전에 둔 시기. 한국사회 구석구석에 알차게 쌓인 적폐들을 청산하려는 시민의 열망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고민한다.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STOP 공동행동’이 세계여성의날에 발표한 선언문에서 말하듯, ‘여풍당당’이나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은 허구이다. OECD회원국 중 부동의 1위인, 100:63(남:여)이라는 성별임금격차는 상징적이며 동시에 여성이 처한 현실 그 자체이다. 외모차별, 고용차별, 직장에서의 업무 배치상의 차별, 유리천장, ‘독박 돌봄(과 그 역할을 당연히 수행할 것으로 간주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함축한다.

그러나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해야 할 정치조차 여성에게 불리하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것이 그 자체로 통계를 낼 의미를 가지는 것은, 정말 단순하게 말을 하자면, 공적 영역을 주도하는 게 대개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주도권을 틀어쥔 정치에서 여성의 문제는 하나의 선택 가능한 분과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이나 성평등 같은 건 이거 먼저 하고 나중에 합시다’ 비슷한 말이 정치판에서도 공공연하게 등장하여 뭇 여성 시민의 공분을 산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발언 중인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한국여성노동자회

 박근혜 파면과 촛불혁명, 그리고 촛불대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랑은 한국의 여성들에게는 어떻게 마침표, 아니, 큰 쉼표 하나를 찍을 것인가. 여성의 요구는 어떻게 ‘맨즈 비즈니스’인 정치에 개입하여 ‘정치가 될’ 것인가. 지난 2월 23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된 대선토론회에서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강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사회적 분할선으로서의 젠더, 여성

1970년대 서구권에서는 여성운동의 제2의 물결이 일었다. 이후 여성이라는 젠더, 또는 젠더로서의 여성은 선천적인 자질이나 천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공통적인 억압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집단으로서의 여성’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 맥락으로 보자면, 젠더는 ‘사회적 분할선’의 일종이다. 이나영 교수는 “계층, 인종, 성(sexuality)처럼 인간을 분리하고 배제하고 불공정한 처우를 정당화하고 불평등한 분배를 고착화”하는 것이 사회적 분할선이라고 설명한다.

한 인간의 삶에는 다양한 분할선이 얽혀있고, 분할선은 인간의 (사회적)위치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할선에 의해 낮은 곳에 위치하게 된 약자의 자리를 ‘소수자성’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수자성은 균일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백인 이성애자 여성자본가와 흑인 레즈비언 여성노동자의 권리 사이에 교집합만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분할선에 의해 각기 다른 자리에 놓인 시민들은 어떻게 하나의 사회에서 살아갈 것인가. 우선 차이를 소거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건 가능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아이리스 영(Young)은 차이를 무시한 채 부르짖는 자유와 평등은 특권화된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특수성을 망각하게 하며, 특권집단 바깥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줄뿐만 아니라 자기비하(나는 ~가 아니라서, 나는 ~라서)를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나영 교수는 ‘집단의 차이를 인정하며 긍정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이해를 인정하고 대변할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의무이다. 아이리스 영은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람들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발 데이비스는 아이리스 영의 접근에 비판을 제기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라 해서 동질적이지 않고, 집단의 경계는 유동적이며, 개인의 차이는 이미 공적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 차이들이 서로 맺는 관계성, 차이의 유동성, 그리고 차이와 차이가 교차하며 재구성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정치학은 자신의 소속된 집단을 동질화하며 타 집단에 대하여 배타적이게 되어버린다.

정체성의 정치학의 대안으로, 유발 데이비스는 횡단의 정치학(transversal politics)을 제시한다. 보편주의는 동질성을 출발점으로 가정하기에 배제로 끝날 위험성이, 상대주의는 타자 간의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서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하거나 진정한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위험성이 있다. 횡단의 정치학은 이 둘과 다르다. 유발 데이비스에 따르면, 횡단의 동행이란 “뿌리는 달리 내리면서도 자신과 양립할 수 있는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광장은 ‘밀려난’ 사람들의 연대의 장이었다 ⓒ신상아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이것이 국가인가.”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물음은 촛불이 되어 광장에 모였다. 정유라-최순실 게이트는 촛불이 크게 불타는 계기였으나, 촛불광장은 투쟁의 발단이 된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촛불광장은 인간의 존엄성에 ‘모르쇠’ 하는 체제로부터 주변으로 그늘로 밀려나던 사람들의 연대체였다. 다양성과 차이의 경험은 시민들로하여금 광장에 ‘창조적 긴장감’을 조성케 하였다.

페미니스트 진영, 성소수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진영은 박근혜 탄핵을 이끈 1,600만 촛불의 물결 속에서 차별과 혐오를 걷어내고 평등과 정의를 외쳤다. 그러한 매 순간마다 갈등이 있었으나, 촛불은 그 갈등을 딛고 한 단계 성숙한 시민의식과 인권의식을 학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와 같은 사회적 분할선에 대한 논의가 가장 역사적인 순간에 시민의 공론장이자 전장에서 힘을 발휘하여 공존의 정치 실현을 도모했다.

그러나 아직도 여성의 요구는 보편적인 정치가 되지 못한다. 촛불대선에서 정권교체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며, 누군가를 위한 ‘단일대오’가 되어줄 것을 주문하는 사람들이야 넘쳐난다. 그러나 이 사회에 뿌리내린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관행들, 그리고 국가를 부정의 구렁텅이로 몰아 온 권력 간의 유착을 극복하는 과제는 정권교체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관계와 다양한 사회적 분할선들, 그리고 이 요소들에 영향을 받는 인간의 삶과 아픔을 중요시하며 구조적 변혁을 지향하는 ‘급진적 혁명의 언어’를 통해 우리는 남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저항의 불꽃을 혁명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변혁의 힘으로 끌고 가는 일일 것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절대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토론회 첫 강의를 다룬 2번 기사에서는 여성이라는 젠더, 젠더로서의 여성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분할선으로서의 젠더를 살펴보았고, 사회 구성원 간에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를 어떻게 인정하고 긍정하며 정치를 이루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접근법을 알아보았다. 이어질 3번 기사는 윤자영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의 “여성노동정책과 돌봄노동에 대한 논의” 발표 내용을 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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